고국의 푸른 삼림이 있기까지
고국의 TV 프로그램중에서 특히 “산” 이라는 화면이 뜨고 고국 산하의 영상이 나오면 항상 떠오르는 옛 추억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옛적의 산과 지금의 산을 비교 하느라면 헐벗고 깡마른 그 옛날 산들은 50년이란 긴세월을 흐르면서 이젠 모든산이 명품 옷으로 휘감은 듯하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60년대 중후반 아마도 고교시절 때인듯 하다. 매년 봄 식목일만 되면 그날은 수업을 쉬고 주변의 산으로 가서 묘목 식수로 하루를 보냈다. 네모난 양은 도시락 점심을 각자 지참하고는 바위밑 그늘진 곳에 각자 도시락을 모아 놓고, 묘목 몇단씩 나누어 챙기고 각자가 아침에 가방대신 들고온 삽을 들고(그 당시 경상도에서는 삽을 수군포라고 불렀음) 우리는 지금의 부산 북구 백양산 기슭으로 올라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아카시아 묘목을 식목한 것이 뚜렷이 생각난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최우선 과제로 강력한 산림녹화를 강조하면서 속성수인 아카시아 묘목으로 우선 헐벗은 산을 푸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어떤 수종이든 빨리 자라는 나무로 덮으라는 강력한 지시에 그 당시는 우선 여기저기 보이는 붉은 황토땅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데 급급했다. 경제적인 수종을 고를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고, 비만 오면 넘쳐나는 홍수에 대비하려는 정책이었던 모양이다.
우선 푸르게 보이게 하는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후 두 번째는 오리목이라는 나무가 급속히 자라는 나무라하여 그걸로 대체한 듯 했다. 그러나 두가지 나무 모두 산림녹화에 다급한 수종이었을뿐 경제성은 전무한 잡목에 불과했다. 그 당시 산림청은 당국의 빗발치는 독촉에 성과를 내는 것이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또 다음 해에는 모두가 그 전해에 심은 묘목이 잡목이라 하여 웬만하면 잘라내고, 소나무나 전나무 등 보기 좋고 후세에 경제성이 풍부한 나무로 식목하라는 지시가 있었는지 60년대 후반에 마지막으로 소나무나 전나무 묘목을 식수한 경험을 나이 든 연장자 분들은 기억할 듯하다.
지금은 인구의 대부분이 등산이나 하이킹을 운동삼아 즐기고 있지만, 그 당시 산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끔 나뭇꾼들이 무거운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내려오거나. 시내에 공양하러 내려가는 스님들의 발길과 새소리의 지저귐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6·25 전쟁후 10여년은 모두가 살기에 바뻣 하루하루 생활고에 시달려 한가롭게 지금처럼 산행을 즐길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때 전국 각지 모든 산에 식목한 수천만그루의 나무들이 반세기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고국의 산하는 세계 제일의 성공적인 산림 조림 모범국가로 칭찬받는다고 한다. 한국의 산천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 산이 그때 그 산이 맞아” 할 정도로 푸르고 싱그러운 녹음이 울창하다. 고국의 산야를 볼 때마다 산림녹화와 세계 초일류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이룩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도전 정신에 새삼 찬사를 보낸다.
지난주 한국은 개도국이라는 옛 명칭을 걷어내고 세계의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선진국대열에 합류했다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기쁜 뉴스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희열을 느꼇다. 오래 전 서울 김포공항을 이륙한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내려다본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의 여기저기 탈모현상 같았던 황토빛 산야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송림이 우거진 울창한 전국의 모든 숲속에서, 마음껏 산속의 둘레길을 산책하고 강변의 도보길에서 자전거를 즐겁게 타는 고국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노라면 다시 한번 오늘날의 조국을 있게 해준 옛적 그시절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가슴 벅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